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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네 명의 프랑스 종군기자가 본 6.25전쟁_한국전쟁통신

by gershom 2012. 8. 10.


한국전쟁통신  _ 세르주 브롱베르제 外 / 정진국 _ 눈빛


북으로 진격한다면 아침은 개성,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식사 대접하겠노라고 대통령앞에서 큰소리치던 대한민국 육군 참모 총장이 급하게 방향을 바꿔 식사장소를 남쪽으로 변경한 덕택에. 표지사진의 저 아이들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주머니에 손 꽂고-자세봐라- 하늘에서 낙하산이 쏟아져 내리는 광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또 그 덕택에 전쟁 발발 두 달여만에 대구 인구가 26만에서 300만 가까이 늘어 경제 활성화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 의하면 그 중 노숙자 수만 200만이었다고 하는데 실제 경제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총장과 대통령께서 '북으로!!' 소리쳤어도 그게 뺑끼페인트모션인줄 알아차린 사람은 재빨리 남으로 향했고 남은 사람은 죽거나 겨우 살아남았다. 나중에 뭐라 변명했을까.. 다 각하 덕택입니다? 아니면. 오리지날 부산 밀면이 먹고 싶었어요? 


밥을 먹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밥줄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기도 한다. 모두들 전쟁을 피해서 남쪽으로 향하는 동안 전투가 한창인 북쪽으로 향한 사람들.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니고 군인도 아닌 프랑스인 기자 4명. 양코쟁이들이 한국인들을 'Gook'이라 부르며 멸시하던 이 후진국의 전쟁터에서 이들은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감탄하고, 촌로의 위엄에 경의를 표하는 예의를 표할줄도 알고, 무지막지한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파괴되는 장면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 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전쟁'하면 의례 떠오르는 화려한 무용담이나 극적인 드라마가 아닌 '전쟁이라고 하는 역겨운 인간사' 뒤에 가려진 이면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평양의 공장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던 김종금이나 평양 근교에서 농사짓던 농부 조일선이 말하는 삶과 전쟁의 이야기들. 빈대 들끓는 잠자리도 마다하지 않았고. 북한군이 매복해있는 길마저도 기꺼이 병사들과 함께하며 몸으로 쓴 이야기들. 세르주 브롱베르제, 필리프 도디, 앙리 드 튀렌, 장 마리 드 프레몽빌. 4명 중 장 마리 드 프레몽빌은 1951년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