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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서울은 깊다

by gershom 2012. 9. 22.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서울은 깊다 _ 전우용 _ 돌베개


강남은 내겐 서울이 아니었다. 

잠실에서 논현동으로, 신사동을 거쳐 양재동, 다시 논현동으로 옮겨가며 보낸 10년간의 직장 생활. 

고층건물에서 회의를 하고 첨단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며 보낸 짧지 않은 시간 내내 나는 플로팅된 물질같았다. 

그곳은 내겐 그저 강남이라는 '지역'이었을 뿐 한번도'시내'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종로와 을지로의 생활. 

조금만 걸으면 산이 있었고, 공원도 있었다. 

피맛골 골목 고갈비와 막걸리 파는 오래된 주점과 단골 해장국집도 생겼다. 

추석 전날 퇴근하는 나를 붙잡고 직접 만든거라며 중국 월병을 쥐어주던 단골 중국집 화교 할머니, 

미역국도 못먹고 정신없이 출근한 내게 메뉴에도 없는 미역국 끓여 생일 축하해주던 단골 식당. 

아. 그리고.. 아버지의 단골 설렁탕집. 

어느새 나는 좁은 골목길로 가득한 시내의 어느 오래된 건물 간판처럼 한 부분이 되어있었다. 

 

예전 직장 건물 앞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창살문과 긴 칼, 대나무 조형물이 있었다.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던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한 뒤 피어난 붉은 대나무, 혈죽이 피어난 자리에 세운 기념물이었다. 

점심 먹으러 가던  태화빌딩 화단 가운데에 있던 육중한 돌 기념비나 지금 사무실 옆 건물앞에 서 있는 주자소 터 표석. 

그저 점심식사 후 담배 한대 피우거나 택시를 타기 위해 몸을 기대고 서있던 장소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던 곳이었는데. 

 

이 책은 잊혀진 서울의 원래 모습이 사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들이 쌓인 장소라는 것을, 

그런 삶이 지금도 이어져 차곡차곡 퇴적되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지난 100년간 의도적이거나 계획적으로 때로는 무지 때문에 조각나고 박제되고 은폐되고 파묻히고 

또 파헤쳐져 사라진 서울의 역사를 정성스럽게 복원해서 내 눈 바로앞에 생생하게 펼쳐준다. 

소박한 문장과 알기 쉬운 표현들에 담겨있는 고수의 깊디 깊은 내공. 올 해 읽었던 책들 중 최고의 책이다. 

전우용 선생께 감사와 존경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