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날들만 기억해2 _ 신종한 外 _ 이숲
새벽에 아버지가 갑자기 깨우셨다. 83년인가 84년인가 기억이 잘 나진 않는데 하여간 휴일 새벽이었다. 전날. 안동 가야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에 출발하는 줄은 몰랐다. 아버지 회사 분이 몰고 오신 봉고차에 구겨지듯 던져져 다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곳은 어느 국도변 휴게소. " 밥 먹자."
운전하시던 직원분은 벌써 휴게소에 들어가셨는지 아버지 혼자 곤히 잠에 빠진 나를 깨우고 계셨다. 차에서 내리니. 해가 떠오르는 동쪽 하늘은 벌겋게 물들어있었고 쌀쌀한 바람 때문에 부르르 떨었던 기억이 난다. "너도 육개장 먹을래?" 아버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주문부터 하셨다. 가득한 숙주 나물과 잘게 찢은 고기 푸짐하게 들어간 벌건 국물에 얇게 썬 고추와 기름이 동동 떠 있던 뚝배기. 갑자기 잠에서 깬 터라 조금 부어있었지만 숫가락으로 푹 퍼 넣은 육개장은 짜증 조차 잊게 할 만큼 맛있었다.
멀리 산 너머 동이 터오던 빨간 새벽 하늘. 차에서 내리자 사정없이 목덜미로 파고 들던 한기. 한가한 휴게소 식당의 두툼한 테이블과 따뜻한 보리차. 알싸하게 매우면서도 입속에 퍼지던 육개장의 고소한 맛. 허겁지겁 퍼먹는 나를 새벽 댓바람부터 깨워서 미안하다..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버지의 얼굴. 벌써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릴때 가족끼리 차려입고 나가서 음식점에 둘러 앉아 외식을 했던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니까. 어딘지 기억도 나지 않는 휴게소의 육개장이 아버지와의 처음 외식이었던 셈이다. 그때는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충주까지 간 뒤 국도로 빠져서 탄금대를 지나 그 높은 죽령 고개를 구비구비 넘어 안동까지 가는데 6시간 가까이 걸리던 때였다. 집으로 돌아올때 차가 막히면 그보다 더 오랜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했고, 그럴때마다 아버지와 함께 국도변 음식점에 들리는 일이 잦아졌다. 운전면허를 따면서부터 안동까지 운전은 내 담당이 되어 버렸다.
만종에서 제천까지 고속도로가 뚫려서 안동까지 3시간 반만에 갈 수 있게 된 2001년. 그 해 12월 25일. 아버지를 안동으로 모셨다. 아버지는 23일 아침에 돌아가셨다. 고집부려서 미안하다..라는 말씀만 남기고. 아니에요. 아버지. 제가 너무 죄송해요.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결국 못했지...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안동 가는 건 처음이었다. 집에서 출발해서 안동까지 3시간 반이면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빨랐다.
퍼붓는 눈 때문에 도로상태가 안좋아지자 버스 운전사는 치악 휴게소에서 눈이 잦아들기를 기다리자고 했다. 하지만 눈은 그칠 기세가 아니었고 휴게소에서 머무는 시간만큼 길에 눈이 더 쌓일것 같았다. 다시 출발했다. "이 고속도로 처음 타는데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네요.." 안동에 도착할때 쯤 눈은 그쳤지만 이미 종아리까지 쌓인 눈. 버스는 화장장까지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오래된 화장장이었다. 낡은 벽. 낡은 축대. 낡은 지붕의 화장장 건물에 관을 내려놓고 낡은 가마의 문이 닫혔다. 그 때. 화장장지기가 돌아서서 가마에 불을 올리던 그 때. 온통 회색이었던 구름이 순식간에 걷히고 거짓말처럼 하늘이 열렸다.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새파란 하늘이 하얗게 눈덮인 산 뒤로 갑자기 나타났다. 눈물이 저절로 멈췄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평화로움에 가슴이 벅찬 느낌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벌써 13년이 지났고 매년 한 번씩 예초기 챙겨서 안동을 간다. 아버지께서 그러셨던것 처럼 나도 내 아이와 휴게소에 들러 식사를 하긴 하지만 그저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라면이나 칼국수로 후다닥 때운다. 일부러 국도를 타지 않는 다음에야 탄금대 앞 장어구이집이나 충주에 있는 시장에 들러 과일을 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안동은 그냥 점點 중 하나가 되버렸다. 고속도로라는 선으로 연결된 의미 없는 점들. 고속도로가 늘어날수록 따라서 늘어나는 수많은 점들.
여행하면서. 유학중에. 혹은 예전에 경험했던 음식에 담긴 잊지 못할 기억과 추억을 담아 여러 사람들의 글을 모은 책이라 '내가 사랑한 세상의 모든 음식'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행복했던 날들만 기억해' 1편에 비해 2편의 글들은 더 좋아진 느낌이다. 책을 읽으니 떠오른 옛날 옛적 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육개장에 대한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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